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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들은 것들

술 한 잔 예술 한 모금 : <그녀의 자리 & 과하주 Bar> 성수 전시 @우란문화재단

by 살리_SALI 2023. 1. 13.

"일 년에 딱 하루" 그녀들만을 위한 자리. 여성들은 함께 술을 마시며 사대부 남성들의 놀이문화인 풍류를 구성하는 술 문화를 문화적 체험으로 전유함과 동시에 일상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 유정선(2009). 화전가에 나타난 여성의 놀이 공간과 놀이적 성격-'음식'과 '술'의 의미를 중심으로-. 한국 고전연구학회 학술저널, 19, 57-83.

예나 지금이나 '여성'과 '술'의 조합은 대개 거칠고 탈규범적인 이미지로 대변된다. 여성들에게는 사회적 규범, 어떤 곳에서는 종교적 규율이 더 엄격하게 적용된다. 이러한 사회 구조 속에서도 의연하게 존립하고 있는 우리 여성들의 자리를 조명하는 독특한 전시가 있다. 과거 여성들에게 술이 지녔던 또 다른 의미와 이야기에 주목하는 전시이다.
바로, 성수동 우란문화재단에서 전시하는 <그녀의 자리>. 성수동에 위치한 우란문화재단은 문화예술적 가치가 있는 실험적인 전시, 공연 등 문화 콘텐츠를 기획하는 공간이다. 나의 영감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애정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녀의 자리
A Place of Her Own

우란이상 (우란문화재단)

기간 2022년 12월 14일 - 2023년 2월 8일
참여작가 박선민, 박혜인, 유진경, 이혜미 최수진

시간 월-토요일 10시-18시, 일요일 및 공휴일 휴관
장소 우란1경

입장료 무료

전시 연계 프로그램_과하주 Bar 예매

*프로그램 예매 후 방문하기를 적극 추천!
전시 방문계획이 있다면, 과하주 Bar를 사전 예매하고 가길 추천한다. 향긋하고 맛있는 과하주 한 잔과 함께 전시를 감상할 수 있다.
https://booking.naver.com/booking/12/bizes/801624

네이버 예약 :: 그녀의 자리

우란문화재단은 2022년의 끝자락 <그녀의 자리 A Place of Her Own>를 개최합니다. 사람이 사는 곳 어디에서나 함께 하는 술. 사람들은 술과 더불어 기뻐하기도 슬퍼하기도 하며 사랑하기도 하고 다투

booking.naver.com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고요하고 우아한 공간 디자인에 놀라 숨소리를 멈추었다. 천장으로부터 길게 늘어 뜨린 파란 술이 내밀한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는 보일 듯 말 듯 술상들이 놓여 있었다.

Bar 프로그램을 예매한 관람객들에게 제공되는 서비스. 총 4가지의 술잔이 놓여 있었는데, 마음에 드는 술잔을 고르면 과하주 한 잔을 따라준다고 하셨다.

모든 잔이 단아하고 우아하고 탐이 났지만, 결국 내가 선택한 잔은 박혜인 작가의 봉규산 유리로 빚은 술잔. 비정형의 곡선으로 빚은 투명한 술잔의 영롱함을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정말로 너무 탐났다.

술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해주시면서 술 한 잔을 쪼르륵 따라주셨다.
과하주는 여성들이 발명하고 여성들이 만든 술이다. 조선시대에는 가정에서 살림을 맡은 여성들이 술을 빚는 역할도 함께 도맡았다고 한다. 제사와 손님맞이, 중요한 의례 및 행사에 쓰이는 술은 그 지역과 가문을 대표하는 맛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오늘의 술은 '규합총서'.

'규합총서' 과하주 빚는 법.
봄과 여름 사이에 멥쌀 2되 또는 1되를 가루로 만들어 범벅을 갠다. 범벅이 식으면 가루 누룩을 5홉을 넣는다. 맛이 써지면 찹쌀 1말을 고두밥으로 쪄 속까지 식혀서 그 술밑에 버무려 둔다. 맛이 써진 후 소주를 부었다가 7일 만에 소주 20 복자씩 붓는다.


쉽게 말해서, 과하주는 발효주에 증류주를 섞은 술이라고 할 수 있다.

알코올 도수는 15도 정도. 한 입에 다 들이키기보다는 향과 맛을 천천히 음미하며 전시장을 둘러보라고 하셨다. 꽃향기가 은은하게 나며, 달달하면서도 바디감이 있는 술이었다. 한 마디로 맛있었다...! 한 잔 더 달라고 하고 싶었...

술을 천천히 음미하며, 이제 그녀들의 방에 한 걸음씩 들어가 본다.


<그녀의 자리>
지니서, 협업장인 김규영

2022, 드로잉 책상과 술상, 느티나무, 흑단

설치미술과 지니서와 목공예 김규영 명장의 협업으로 완성된 작품. 첫 번째 들어 간 방에는 두 개의 상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지니서가 디자인한 '그녀의 책상'과 '그녀의 술상'이다. 작가는 어릴 적 전통 한옥의 기억을 떠올리며 정갈한 모양의 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술상은 술을 통해 타인과 나누는 일종의 사회적 공간이이다.

'일상의 몸짓은 습관이 되고, 습관의 태도를 형성하며, 태도는 의식을 만들고, 의식은 정체성을 말하고, 정체성은 몸짓이 된다'

이 생각을 명료한 디자인을 통해 하나에서 둘이 되고, 둘이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 상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Variable Set>
이혜미

2022, 혼합소지, 백자소지, 핸드빌딩, 물레성형

이혜미 작가가 술 문화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자유분방함과 편안함이다. 작가는 일상적인 공간에서 가까운 사람들과 가졌던 술자리에서 누린 즐거움을 표현했다. 옹기종기, 알록달록 쌓여있는 술잔들이 소박하다.

어미 오리와 그 뒤를 종종종 따라가는 새끼 오리들은 술을 마시고 시시닥거리며 심심풀이로 만들어 본 걸까? 그녀의 작업실에 초대된 듯 아늑하고 정감 있는 공간이다.



<시절의 잔상>
박선민

2022, 폐유리병, 연마기법, 조각, 블로잉

'응답하라 1988'이 생각나는 구수하고 정감 있는 분위기의 술상. 박선민 작가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할머니의 담금주는 그녀의 기억에서 큰 자리를 차지한다. 직접 담근 술을 보관하던 꿀단지, 유자청, 양주병, 주스병 등 다양한 병들은 새로운 쓰임을 찾고 할머니의 주방을 한 켠에 자리 잡고 있었다.
폐유리병으로 그 시절의 기억을 재현하였다. 리사이클링을 통한 작업이 생활감을 더해 주는 듯하다. 이 세상 쓸모없는 것은 단 한 개도 없다는 듯 뭐든 알뜰살뜰하게 활용하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 그녀들의 지혜를 닮아있다.

아기자기한 꽃문양에서 할머니의 취향이 묻어난다. 왠지 그녀의 젖은 앞치마, 그녀의 반짇고리, 그녀의 쭈굴쭈굴하지만 따뜻한 손까지도 짐작하게 된다.

세로결이 만들어 낸 굴절 무늬가 유난히 이 풍경을 더 아련하게 만든다. 마치 어린 시절 흐릿해져 가는 기억의 잔상처럼.


<안전한 술자리를 위한 도구들>
최수진

2022, 혼합소지, 은, 천
손성형, 1260º 산화소성
살벌해 보이는 이 술상은 뭘까? 작가는 역사적 문헌에서 여성들의 술자리가 드러난 바는 거의 없으며, 그나마 존재하는 기록조차 깊은 애환이 서려있는 이야기라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잔에 돋아 있는 뾰족한 뿔, 묵직한 검. 여인들이 짜던 삼베가 마치 바리케이드처럼 주변을 감싸고 있다. 과거 억압과 구속에 갇혀 있던 그녀들을 위한 안전한 술상이자, 여전히 어딘가에도 존재하고 있을 그녀들에게 바치는 위로와 용기의 술상이다.


<기념의 날을 위한 증류장치>
박혜인

2022, 내열 유리, 맥주, 램프워킹
제작 협업: 정우과학

기다랗고 영롱하게 빛나는 유리 작품. Bar에서 내가 선택한 술잔을 만든 박혜인 작가의 메인 작품이다. 증류장치가 이렇게 우아할 일이란 말인가. 유연하게 춤추는 날개 혹은 물을 흡수하며 생체활동을 하는 꽃잎 같다. 기존의 과학 실험 기구를 새롭게 재창조한 증류장치로써 맥주가 정제되는 과정이 하나의 예술로 표현되었다. 작가는 유리의 유동성과 생명력에 주목한다. 단단한 유리에 열을 가하여 순간적으로 형상을 만들 수 있는 물성은 마치 생명체와 같다.

글라스에 맺혀있는 수증기들이 의도하지 않은 우연의 아름다움처럼 빛난다.

자유롭게 춤추는 유리 조각들. 술 한 잔이 주는 기분 좋은 해방감을 닮았다. 나는 이런 비정형의 유연한 형태가 좋더라.


<품다>
유진경

2022, 오동나무, 낙동법

'화전가'에 등장하는 '덴동어미'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 불에 덴 아이의 엄마라는 뜻으로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을 딛고 달관의 경지에 이른 여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다. 설명을 읽고 작품을 보니, 어딘가 모르게 착 가라앉은 무거운 슬픔과 고난을 이겨 낸 단단함이 느껴진다.
선조들은 딸을 낳으면 뜰 안에 오동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생장 속도가 빨라 딸이 결혼할 때쯤에 그 나무로 장을 만들어 혼수를 보냈다고 한다. 품고 있던 딸을 보내며, 손수 깎아 만든 장을 함께 보내는 그 심정이 어땠을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둥근 상판만을 켜켜이 쌓아 올린 가구가 투박하지만, 오랜 시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그녀들을 상징하는 것 같다.



과거 술과 유흥이란 남성들의 전유물과도 같았었는데, 여성들만의 술 문화에 주목하고 재해석한 기획 의도부터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조심스레 술을 열고, 그녀들의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경험도 독특했다. 아주 개인적인 공간 속의 내밀한 기억이면서도,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각각의 방 안에 담긴 기억과 문화와 사유와 창조성에 감탄했다.
그리고, 과하주는 아주 달콤했다. 한 모금에 입 안 가득 퍼지는 꽃과 과일향을 잊을 수 없다. 오랜 시간 빚고 기다리고, 오랜 세월 전해져 내려온 그녀들의 술은 정말이지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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