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홀씨 한 가닥 한 가닥을 떼어 LED 전구에 연결한 조명이 있다면...! 3D프린터기로 뽑아낸 모형이 아니라, 실제 1만 5천 개의 민들레라면...!!!
예술 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이런 집요함으로,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고, 섬세한 움직임을 설계하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단 하나의 기계를 발명하는 네덜란드 아티스트 듀오가 있다. 자연의 움직임과 원리를 공학적으로 해석하고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드리프트, DRIFT'. 그들이 아시아 최초로 서울 한남동 현대카드 스토리지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드리프트 아시아 최초 전시
DRIFT : In Sync with the Earth
기간
2022.12.8(목) ~ 2023.4.16(일)
장소
현대카드 스토리지
예매
현대카드 DIVE 앱 및 멜론 티켓
홈페이지
http://dive.hyundaicard.com/web/storage
STORAGE | 현대카드 DIVE
dive.hyundaicard.com
현대카드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 콘텐츠들을 익히 알고 접하고 있던 터. 다이브 앱을 보다가 신기한 전시를 발견했다. 냅다 예약을 하고, 한남동으로 달려갔다. 현대카드 라이브러리는 몇 번 가보았지만, 현대카드 스토리지는 첫 방문이었다. 뮤직 라이브러리와 바이닐&플라스틱 사이의 계단으로 내려가면 마치 뉴욕 골목의 재즈바 같은 입구가 있다.
네덜란드를 기점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 듀오 DRIFT. 그들의 매개체는 자연, 인간, 그리고 이 모두를 아우르는 환경이다. 공학 기술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험적인 작업을 선보인다.
We don't know what the objects that surround us ard made of anymore, in the end they all come frome the earth.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사물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결국 이들은 모두 지구로부터 나온 것들이다.
-DRIFT
Materialism
우리는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개념적으로는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가시적으로 느낄 수 있는 건 피부 겉가죽, 머리카락 정도이다. 수분,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헤모글로빈 등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을 한눈에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Materialism이 바로 그런 작업이다.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사물, 그리고 우리 인간을 물질 단위로 분해하고, 각각의 원료들을 동일한 양과 비율로 보여준다.
전시장 가운데에는 인간을 0세부터 4세, 40세, 80세, 그리고 죽음까지 구간을 나누어 인생의 흐름을 보여준다. 분명 같은 물질, 정확한 양과 비율인데도, 완전히 다른 형상으로 인해 낯설고 경외하는 기분이 들기까지 한다. 게다가 반듯반듯한 블록 형태로 재현하니, 마치 현대 도시의 건축물을 연상하게 한다. 객관적 타자가 되어 인간이라는 물질을 관망하는 듯한 경험하게 된다.
인간을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압축할 수 있는 거였어...?
깔끔하고 안정적인 비례와 리드미컬한 배치가 재밌다. 오롯이 원료 자체로 존재하니 빛의 반사와 굴절 등 완전체에서는 없던 현상도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그런데, 어쩐지 묘하게 형용할 수 없는 낯설고, 다가갈 수 없는 두려움의 이유를 방금 깨달았다. 모티브가 인간인데,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깍둑썰기한 큐브라니... '인간으로 비누를 만든 다면 이런 비주얼일까...?' 따위의 자꾸 불쾌한 연상작용이 일어난단 말이지. 이런 감상의 가능성까지 예상하고 작업한 걸까?
아이폰 4S를 물질 단위로 해체하면 이런 모습. 유리, 스테인리스 스틸, 폴리카보네이트, PVC, 구리, PET, 알루미늄, 실리콘 등등. 이 한 줌도 안 되는 원료들이 결합하면 우리 일상에 필수 불가결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한국인의 매운맛, 신라면. 한국에서의 전시를 위해 특별히 작업했나 보다.
명품시계의 대명사, 롤렉스. 스테인리스 스틸, 황동, 사파이어 크리스탈, 백금, 알루미늄 등. 물론 비싼 재료도 섞여있지만, 원료의 민낯을 보니, 명품이 뭐라고. 한낱 기계 조각들처럼 보인다. 수 천만 원의 잠재적 가치를 지닌 물건이라는 사실은, 작품 제목을 보기 전까지는 절대 모른다.
Shylight
거꾸로 매달린 꽃이 활짝 피었다가, 오므렸다가, 음악에 맞춰 움직이는 꽃의 우아함에 잠시 넋을 놓고 보게 됐다. 이 키네틱 아트는 꽃들의 수면운동에서 영감을 받아 공학적으로 설계했다고 한다. 수면운동이란 밤낮의 길이와 온도, 습도에 반응하여 잎과 봉우리를 스스로 움직이는 개폐활동이다.
언제 봉우리가 푱! 촤라락- 펼쳐질지 몰라서 계속 천장을 응시하면서 꽃이 피기만을 기다린다. 꽃이 만개하면 가장 밝은 빛을 발산하며 낙하산처럼 가볍게 내려온다. 예측할 수 있는 패턴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음악의 박자와 리듬에 맞춘 건지, 그들만의 정교한 규칙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살아 있는 생명체만큼 자연스럽고 우아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100번 이상의 레이저 커팅과 40시간 이상의 손바느질을 거쳐 다듬어졌으며, 밀리미터(mm) 단위까지 기계의 움직임을 설계했다고 한다. 발레리나의 치맛자락처럼 가볍고 우아한 몸짓이 연약해 보이지만, 가장 부드럽고 견고한 힘을 가졌을 것만 같다.
Amplitude
꽃을 보고 나니, 이번에는 새가 날갯짓을 하고 있다. 기다란 투명 유리관이 차례대로 움직이며, 찬란하게 빛난다. 관 안에 구슬이 있어서 왔다 갔다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투명관과 빛의 움직임이 서로 상응하는 것처럼 규칙적이다. 이 작품의 움직임은 정말로, 눈으로 봐야만 그 숭고한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을 것 같다. 기계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고...?!
몇 달 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봤던 최우람 작가의 작은 방주가 떠올랐다. 작은 방주가 묵직하고 웅장한 대항해의 시작이었다면, 이 작품은 새의 날갯짓 같기도, 바닷속에서 유영하는 고래 같기도,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 같기도 하다. 지구상에 인간보다 먼저 이런 모습으로 존재해 왔던, 자연과도 같아 보였다.
앞서 본 하늘하늘한 꽃잎처럼, 이 투명한 유리관도 깨질 듯한 연약한 물성을 가지고 있다. 약해 보이지만 강한, 아름답지만 경외시 하게 되는, 양가적인 감정을 갖게 한다.
Fragile Future
약 1만 5천 개의 실제 민들레가 조명이 되었다. 민들레 홀씨 한 가닥 한 가닥이 LED 전구를 감싸는 전등갓이 되었고, 민들레 한 점 한 점이 모여 군락을 이루고 있다. 불규칙하게 모여있지만, 하나의 유기체 같다. 이 공간에 들어오면, 어느 시골 호숫가, 동화 속 요정들이 살 것 같은 마을에 들어온 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내 눈을 의심하게 된다. 재채기라도 한 번 잘못하면, 민들레가 후- 하고 부서져 버릴 것 같다. 제일 연약한 생명체들이 모여 제일 강렬하고 화려한 빛을 내뿜으며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차갑고 딱딱한 기계장치 속에서 따뜻한 빛을 발산하는 이 민들레가, 실제 우리의 자연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We want people to feel the relation to the environment and the impact that the environment has on them.
사람들이 자연환경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고,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느끼길 바란다.
-DRIFT
마지막 공간에는 메이킹 과정을 전시하고 있다. 스케치, 설계 도면, 전기회로, 프로토타입들. 얼마나 집요하게 만들어냈는지 알 수 있다. 보이지 지 않지만, 이 안에 얼마나 많은 땀과 손때들이 묻어있을지 느껴진다.
Materialism을 만들기 위한 원료 분석.
Amplitude의 아름다운 비행을 완성하기 위한 설계도와 모형들.
우아한 꽃잎의 움직임 뒤에 숨어있는 작업자들의 눈과 손이 바쁘게 움직였던 시간들.
민들레 조명을 만들기 위한 인고의 시간들이 엿보인다.
전시장이 크지 않아, 열심히 사진을 찍고 둘러보아도 30분 남짓이면 충분히 볼 수 있다. 짧지만, 뇌리에 아주 강렬하게 인식되는 전시임은 분명하다. 특별히 의미를 해석하지 않아도, 낯선 경이로움에 두 눈이 반짝이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시대의 설치미술, 특히 키네틱 아트가 궁금하다면 꼭 봐야 하는 전시이다.
우리를 둘러싼 사물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인간은 자연의 규칙적 혹은 불규칙적 움직임 사이에서 어떻게 공존하고 있는가. 우리는 유기체처럼 잘 연결되어 같은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집요하고 섬세한 테크놀로지를 통해 하나의 축소판 지구를 본 것 같다. 인간의 생과 사, 우리 주변의 사물과 환경들, 자연의 움직임, 이 모든 것들의 관계.
우리는 계속 이렇게 아름답게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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