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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들은 것들

도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야? : <마틴 마르지엘라> 전시 후기 김찬용 도슨트 투어 @롯데뮤지엄

by 살리_SALI 2022. 12. 29.

 

 

마틴_마르지엘라_전시_라이트_테스트


디자이너들의 아티스트, 마틴 마르지엘라. 그는 왜 얼굴을 숨길까?

이름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천재 디자이너이자 예술가. 패션계를 떠났던 그가 지난해 파리 전시 이후, 서울에서도 전시를 개최했다.



 

마틴 마르지엘라 Martin Margiela
at Lotte Museum of Art

 

기간
22.12.24(SAT) ~ 23.03.26(SUN)

장소
롯데뮤지엄

 

 




마틴_마르지엘라_전시장_입구
마틴_마르지엘라_전시_티켓_브로셔


전시 포스터, 브로셔, 티켓에 사용된 데오도란트는 그의 세계관에서 상당히 중요한 매개체이다. 그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체취를 인위적으로 없애는 물건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현대인들이 자연스러운 상태를 거스르는 데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마틴_마르지엘라_전시_인트로_김찬용_도슨트


이번 전시는 김찬용 도슨트 님의 님의 가이드를 따라 관람했다. 언제 들어도 귀에 쏙쏙 박히는, 도슨트 님의 약간 시니컬하면서도 수더분한 설명! '현대미술? 어렵지 않아요. 좋으면 좋은 대로, 구리면 구린대로 그게 각자의 해석!' 같은 뉘앙스랄까. 내가 현대미술을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 미술은 아름답고 숭고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좋다! 혹은 슬프다... 혹은 별론데...? 등 감상은 내 자유라는 점이 재밌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라는 속성은 특정한 상황에서만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그러한 상황은 아름다움이란 속성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틴 마르지엘라, Martin Margiela

 

마틴_마르지엘라_전시_레터링


먼저, 입구에서 전시 소개를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적잖이 당황하게 될 것이다. '레터링이 왜 저렇게 대충 붙어있지? 전시장 관리 안 하나?!'하는 생각이 분명 들 텐데, 뜯어질 듯 무심하게 붙어있는 레터링은 철저히 작가가 의도한 대로 연출된 것이라고 한다. 허술한 전시장 비주얼에 놀라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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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 포트레이츠, Hair Portraits, 2015-2022

헤어 포트레이츠
Hair Portraits

머리카락으로 얼굴이 뒤덮힌 모델의 잡지 커버들이 벽에 나란히 붙어있고, 바닥에도 산처럼 잡지가 쌓여 있다. 이발소를 운영하시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 어릴 적부터 가발을 많이 접해 온 덕에 그에게 머리카락은 영감이 원천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가발로 만든 옷을 선보인 적도 있었으며, 이번 전시에도 머리카락을 통해 상징적인 메시지를 표현하는 작업들이 많다.

마틴_마르지엘라_전시_헤어_포트레이츠
헤어 포트레이츠, Hair Portraits, 2015-2022


마르지엘라는 현 시대를 이미지 욕망의 시대라고 말했다. 당대 아이콘들의 화보로 장식되곤 하는 잡지 커버는 대중이 욕망하는 이미지 그 자체를 상징한다. 그런데,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감춰버렸다. 패션 디자이너 시절부터 그는 감추고 숨기는 기법을 좋아했다. 숨김으로써 우리의 호기심은 더 증폭되고, 그의 존재감은 더 확고히 드러난다.

머리카락에 숨겨진 저 모델들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쇼 피날레에 등장하지 않는 디자이너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헤어 포트레이츠, Hair Portraits, 2015-2022
마틴_마르지엘라_전시_헤어_포트레이츠_퍼포먼스마틴_마르지엘라_전시_헤어_포트레이츠_퍼포먼스
헤어 포트레이츠 퍼포먼스


마르지엘라 전시에서 꼭 주목해야 할 것은 퍼포먼스이다. 일정시간마다 스탭들이 아주 짧고 단순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는 벽에 걸린 잡지들 빼서 잡지 더미 위에 올려두었다. 잠시 떠올랐다가 저무는 스타를 상징하듯이. 이 퍼포먼스를 보지 못한 다음 관람객은 잡지가 걸려있던 흔적을 보면서 원래 작품이 걸려있던 것인지, 이 흔적 자체가 작품인 것인지 헷갈릴 것이다. 아마도 이 모든 과정이 작품일 테다.


마틴_마르지엘라_전시_더스트_커버
더스트 커버, Dust Cover, 2021

더스트 커버
Dust Cover

아마도 제일 호기심을 자극할 작품, 더스트 커버. 이 안에 뭐가 있을까? 얼핏 오토바이인 것 같기도 하고, 계속 보니 오토바이라고 하기에는 안장도 높고, 핸들 모양도 좀 이상하다. 무슨 기계일까? 흠, 도저히 모르겠다. 가죽은 소가죽일까? 혹시 그냥 이 가죽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정체 모를 무언가를 덮고 있는 이 가죽 커버 앞에서 별의별 질문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사실 관람객들의 이러한 호기심이 이 작품을 완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틴_마르지엘라_전시_더스트_커버
더스트 커버, Dust Cover, 2021


이 작품이 더 재밌는 건 마치 관람객을 시험하듯이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커버 한쪽이 살짝 들려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안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만 같다. 도슨트 님의 설명으로는 조금 부끄러운 자세로 누워서 올려다보면 보인다고 한다! 정말 궁금해서 전시 오픈 전에 누운 채로 들여다보셨다고... 정말 궁금하신 분들은 관람객이 없을 때 누워서 보라고, 하지만 보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고 말씀하셨다. 보고 나면 더 이상 호기심이 사라져 이 작품에 대한 흥미가 식어버릴 테니까.


마틴_마르지엘라_전시_바니타스
바니타스, Vanitas, 2019

바니타스
Vanitas

가발 다섯 개가 비장하게 놓여있다. 그냥 평범한 가발은 아니다. 앞뒤가 없어서 살짝 기괴하다. 앞에서 본 잡지 커버처럼 얼굴이 없는 익명의 두상들이다. 다섯 개의 머리카락 색이 다르다는 건 바로 알 수 있을 테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머릿결이 다르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왼쪽의 밝고 생기 있는 건강한 머리카락이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점 푸석푸석해지고, 색깔이 탁해진다. 작품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이 다섯 개의 가발은 인간의 노화를 상징한다. 바니타스(Vanitas)는 삶의 공허함, 덧없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예술작품을 의미한다.

마틴_마르지엘라_전시_바니타스
바니타스, Vanitas, 2019
마틴_마르지엘라_전시_바니타스
바니타스, Vanitas, 2019


다섯 개의 가발로 이렇게 간결하게 인간의 생애를 압축하여 보여줄 수 있다니.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아주 길고 지난한 세월을 살아내는 듯 하지만, 그저 정해진 순리대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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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 파트 블랙 앤 화이트, Body Part B&amp;W, 2018-2020
바디 파트 블랙 앤 화이트, Body Part B&amp;W, 2018-2020

바디 파트 블랙 앤 화이트
Body Part B&W

마르지엘라가 얼마나 자연스러운 변화를 추구하는 아티스트인지 느낄 수 있는 작품이 있다. 롤스크린에 그려진 두 점의 쌍둥이 같은 작품. 원래는 거울 반전을 한 것처럼 똑같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하지만, 두 작품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미묘하게 다른 디테일들을 발견할 수 있다. 달라진 이유는 시간이 지날수록 두 그림이 각각의 변화를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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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 파트 블랙 앤 화이트 퍼포먼스


이 작품도 일정시간마다 스탭이 롤스크린을 안으로 집어넣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그 어떠한 코팅도 되어있지 않은 그림은 스크린이 말려들어갈 때마다 아주 조금씩 스크래치가 생길 수밖에 없다. 마르지엘라는 이런 스크래치 또한 자연스러운 세월의 흔적이고, 고유의 개성이라고 말한다. 똑같이 생겼던 두 그림은 마치 쌍둥이 형제가 서로 다른 환경과 풍파를 맞으며 살아가듯이, 유일한 존재로서의 가치를 갖게 된다.


토르소 시리즈, Torso Series, 2018-2022

토르소 시리즈
Torso Series

이 안에는 또 뭘 감춰두었을까?

토르소 시리즈, Torso Series, 2018-2022
토르소 시리즈, Torso Series, 2018-2022


사람 신체의 일부분만 따 와서 만든 토르소 시리즈. 몸을 요상하게 꼰다던지 구긴다던지 특이한 포즈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 일부분만 잘라냈기 때문에 어떤 부위인지 쉽게 예측할 수가 없다. 어깨인가, 엉덩이인가, 알듯 말듯하다. 역시 호기심을 증폭하며 가만히 보게 만든다.

토르소 시리즈 퍼포먼스


스탭이 토르소 작품 하나를 덮고 있던 덮개 천을 옆 토르소로 옮기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덮개의 위치는 스탭 마음, 랜덤이라고 한다. 퍼포먼스를 보지 못한 관객은 또, 이 덮개 안에는 뭐가 있을지 무한 상상을 하게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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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 시리즈, Phantom Series,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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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 시리즈, Phantom Series, 2021


전시장 곳곳에 있는 팬텀 시리즈도 꼭 놓치지 않길 바란다. 작품 대신 흔적만 남은 작품들. 과연 무엇이 놓여있었을지, 무엇이 진짜 작품인지, 질문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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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네일즈 모델, Red Nails model, 2021

레드 네일즈
Red Nails

강렬한 붉은빛의 손톱 모형. 우리 신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고, 기능적으로 중요도가 낮은 부위인 손톱. 동시에 가장 화려한 패턴과 강렬한 색으로 돋보일 수 있는 부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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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네일즈 퍼포먼스


여기에도 짧은 퍼포먼스가 숨어 있다. 블라인드가 걷어지면서 뒤에 거대한 작품이 등장하는데...!

마틴_마르지엘라_전시_레드_네일즈
레드 네일즈, Red Nails, 2019


똑같은 모양으로 100배는 확대된 듯한 또 다른 거대한 레드 네일즈가 등장한다. 일상적인 소재의 크기 변화만으로도 낯선 자극을 준다. 마르지엘라는 이렇게 계속 관람객에게 자극과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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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테스트, Light Test, 2021-2022

라이트 테스트
Light Test

한 여성의 뒷모습이 영상에 등장한다. 앞으로 돌아보려고 하는 찰나에, 뜬금없는 광고 영상이 나타난다.

마틴_마르지엘라_전시_라이트_테스트
라이트 테스트, Light Test, 2021-2022


상쾌하고 청량한 분위기의 데오도란트. 데오드란트가 전시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 마르지엘라는 전시 내내 숨기고, 감추고, 보여주지 않는다. 마르지엘라의 데오도란트를 통해 반추해 보건대, 우리 현대인들의 평상시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각자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남긴 채, 억지로 숨기고, 감추고 있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

마틴_마르지엘라_전시_라이트_테스트
라이트 테스트, Light Test, 2021-2022


데오도란트 광고가 끝나면, 뒷모습의 여자가 앞을 보지만, 역시 머리카락으로 얼굴이 뒤덮여 있다. 그리고, 가소롭다는 듯이 해괴망측한 웃음소리를 연발한다. 마치 '내가 얼굴을 보여줄 줄 알았어? 깔깔깔' 이렇게 비웃는 듯이... 이 작품 근처에부터 이 여자의 오싹한 웃음소리가 귀에 따갑게 꽂힐 것이다...


 

마틴_마르지엘라_전시_작업중간과정
마틴_마르지엘라_전시_작업중간과정마틴_마르지엘라_전시_작업중간과정


작업 중간 과정을 보여주는 사진과 스케치들.

마틴_마르지엘라_전시_데오도란트


이 전시는 패션 디자인 전시가 아니다. 예상했던 전시 내용이 아니어서 실망한 분들도 몇몇 있었다고 한다. 패션 디자이너로서가 아닌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관으로 영역을 넓힌 아티스트 마르지엘라의 현대미술을 볼 수 있는 전시이다. 무엇을 보든, 무엇을 듣든, 열린 마음과 관대한 호기심으로 다가간다면 다채롭게 즐길 수 있다. 단순한 듯 하지만, 인생을 관통하는 꽤 묵직한 주제도 담고 있으며,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숨기며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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